Sincerely Perspectives

좋은 결정은 스무 해 뒤에 도착한다

신시어리가 제작한 SK하이닉스 Open 페이퍼박스

얼마 전 SK하이닉스의 굿즈를 만들었습니다. 지식포럼을 위한 필기구로 구성된 굿즈였습니다. 반도체는 머리카락보다 훨씬 작은 세계에서 작동하지만, 그 회사의 이름을 담는 일은 의외로 손바닥만 한 물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로고의 위치를 몇 밀리미터 옮기고 종이의 색을 다시 맞추는 동안, 저희는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SK 하이닉스 굿즈
SK 하이닉스 굿즈

지금의 SK하이닉스는 AI 시대를 대표하는 메모리 기업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름만 보면, 24년 전 이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성공은 지나고 나면 늘 계획대로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길은 반듯하지만, 정작 오르는 사람 앞에는 안개와 낭떠러지와 대출 이자 납부일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의사결정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답을 고르는 일일까요. 아니면 아직 보이지 않는 10년 뒤, 20년 뒤를 위해 오늘의 불편과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일일까요.

팔지 않기로 한 날

2002년 4월 30일, 하이닉스 이사회는 마이크론과 맺은 메모리사업 매각 양해각서를 검토한 뒤 매각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시 회사는 워크아웃 상태였고, 누적 적자와 부채는 생존을 의심하게 할 만큼 컸습니다. 매각은 적어도 당장의 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사회는 매각 뒤 남을 법인의 현금흐름과 부채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오히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시장의 회복 가능성과 기술 경쟁력을 근거로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습니다. 당시의 짧은 공식 입장은 지금도 SK하이닉스 뉴스룸에 남아 있습니다.

이 결정을 낭만적인 영웅담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독자생존은 그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무엇이 회사를 다시 일으킬 유일한 힘인지 정하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하이닉스는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혹독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도 핵심 R&D 인력은 지켰습니다.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300mm 웨이퍼 전환을 생존 전략의 중심에 놓았고, 기존 장비를 개조해 새 공정을 구현한 ‘블루칩 프로젝트’로 투자 여력을 보완했습니다. 한국경제가 복기한 당시의 회생 과정에 따르면, 회사는 2004년 1조 6,92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고 3년 9개월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습니다. 기적처럼 보이는 회복의 내부에는, 사실 같은 방향을 향해 반복된 몹시 현실적인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전략은 더하기보다 빼기에 가깝다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Michael E. Porter)는 전략을 유행을 빨리 알아채는 능력과 구분했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시장 변화는 중요하지만, 그것만 좇으면 모든 회사가 비슷한 제품과 비슷한 활동을 조금씩 더 빨리 수행하게 됩니다. 포터에게 전략은 고유한 가치를 만들기 위해 어려운 상충관계를 받아들이는 규율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엇을 할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는 격변기에도 기업은 고유한 위치를 꾸준히 개선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하버드비즈니스스쿨의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변화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침반을 지키기 위해 돛의 각도는 계속 바꾸어야 합니다. 하이닉스도 2002년의 공정과 제품을 그대로 보존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장비를 바꾸고, 공정을 바꾸고, 조직을 바꾸고, 훗날 HBM이라는 새로운 메모리의 가능성에 투자했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반도체, 그중에서도 메모리 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역량을 쌓겠다는 방향이었습니다. 좋은 회사는 파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파도가 올 때마다 배를 호텔이나 수상비행기로 개조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경영 연구자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이를 고슴도치 콘셉트(Hedgehog Concept)라고 불렀습니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는 고대 우화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그가 오랜 기간 뛰어난 성과를 이어간 기업들을 연구하며 발견한 것은, 위대한 기업이 무작정 “세계 최고가 되겠다”고 외친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를 냉정하게 이해하고, 그 한 방향과 일치하는 좋은 결정을 오랜 시간 쌓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콜린스는 이것을 목표나 구호가 아닌, 자기 가능성에 대한 겸손하고도 명료한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기업의 운명은 한 번의 천재적인 선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2002년의 결정은 문을 닫지 않은 일이었고, 그다음에는 R&D 인력을 남기는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다음에는 300mm 웨이퍼에 투자하고, 부족한 장비를 개조하고, 수율을 높이고, 다시 다음 세대 메모리에 투자하는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먼 미래를 위한 결정은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예언이 아닙니다. 오늘의 자원을 어디에 쌓을지 매일 같은 기준으로 정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스무 해 뒤의 결과는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지만, 그 소인은 매일 찍힙니다.

한 방향을 오래 선택한다는 것

신시어리에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소비자를 위한 굿즈를 직접 판매할 수도 있고, 인기 상품을 만들어 유통할 수도 있으며, 여러 제품을 대신 찾아주는 에이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 매력적인 기회이고, 어쩌면 당장의 성장에는 더 빠른 길일 수 있습니다. 사업 기회는 대개 정중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거절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신시어리는 B2B 브랜드굿즈라는 한 방향을 선택합니다. 기업과 기관이 오래 고민해 만든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와 기념의 순간을 사람들의 일상에 닿는 물건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저희의 미션인 당신의 철학이 세상에 닿도록(We Share What You Stand For)과 비전인 고객의 철학이 일상 속에서 사랑받는 방법을 만들기(Make Your Values Beloved)도 그 선택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집중은 같은 제품만 영원히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브랜드의 철학을 전하는 방법은 노트와 펜에서 키트와 머신으로, 그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경험으로 넓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형태를 선택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고객의 철학을 더 선명하고 오래 전달하는가. 그래서 제품을 개선하고 사용성과 인쇄, 내구성과 안전을 먼저 검증하며, 제작과 배송의 시스템을 다듬습니다. 변화는 방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더 잘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SK하이닉스 굿즈를 만들며 저희가 인상 깊게 본 것도 화려한 성공의 숫자보다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선택의 시간표였습니다. 2002년 이사회가 본 것은 다음 분기의 편안함이 아니라, 회사가 10년 뒤에도 자기 기술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을 겁니다. 당장의 위험을 피하는 대신 세계 최고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역량을 보존했습니다. 오늘의 HBM은 2002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낼 조직의 방향은 그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굿즈 역시 작은 의사결정입니다. 어떤 물건을 만들 것인지, 그 위에 어떤 문장을 남길 것인지, 받는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지 정합니다. 하나의 노트가 회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한 회사가 오랫동안 지켜온 방향을 매일 펼쳐보게 할 수는 있습니다. 철학은 거창한 발표에서 생기지만 문화는 반복되는 작은 선택에서 자랍니다. 좋은 결정이 먼 훗날 도착하는 이유도 아마 같습니다.

신시어리가 세계 최고의 브랜드굿즈 회사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고슴도치라면 아마도 그런 선언보다 오늘 해야 할 한 가지를 더 정확히 아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저희는 세상의 모든 좋은 사업을 조금씩 해보는 영리한 여우보다, 고객의 철학을 일상에 전하는 한 가지 일을 오래 파고드는 고슴도치로 남아보려 합니다. 고슴도치의 가시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것은 유감이지만, 집중에는 꽤 도움이 됩니다.

Sincerely Yours,
가는 길이 지루해도 언젠간 100점을 맞고 싶은 신시어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