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Perspectives

자유롭지 않을 자유

미국 독립 250주년을 상징하는 자유와 선택에 대한 대표 이미지

얼마 전, 저희 신시어리는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하는 굿즈를 만들었습니다.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의 한 건물에서 몇 사람이 종이 위에 서명을 한 지 꼭 2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오늘이 7월 3일이니, 지구 반대편에서는 내일이면 밤하늘 가득 불꽃이 터질 겁니다. 250주년 굿즈를 제작하며 그 나라가 250년 동안 가장 아껴온 단어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유(Freedom)입니다.

주한미국대사관과 제작한 250주년 굿즈
주한미국대사관과 제작한 250주년 굿즈

자유. 참 좋은 단어입니다. 누구도 자유를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광고에도, 헌법에도, 자동차 이름에도, 심지어 어느 청바지 브랜드에도 들어가 있죠.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그토록 원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유가 넉넉히 주어진 순간에는 왜 그렇게 자주 막막해지는 걸까요. 텅 빈 주말 오후, 무엇이든 해도 되는 그 완벽한 자유 앞에서 우리는 어쩐지 소파에 눌어붙어 리모컨만 하염없이 넘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이 이상한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문장으로 붙잡은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였습니다. 그는 1945년의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선고받았다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선고란 본래 형벌에 쓰는 말입니다. 징역형, 벌금형처럼요. 그런데 사르트르는 가장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자유에 가장 무거운 단어를 붙였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아무런 사용설명서 없이 던져집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태어나고, 컵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정해진 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잔인한 조항이 하나 붙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미루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것도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요.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롭지 않을 자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형(刑)에 처해진 채, 도무지 그 형을 면제받을 방법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주말 오후의 그 막막함은 게으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자유 앞에 선 인간이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기증이었던 겁니다. 사르트르보다 조금 앞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아예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나면 오히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권위나 관습, 집단 속으로 서둘러 숨어버린다고 보았습니다. 자유는 선물처럼 도착하지만, 종종 청구서처럼 무겁습니다.

뇌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 자유, 정확히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과연 우리 머릿속에 실재하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여기에 대해 가장 곤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의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 1916-2007)은 지금도 회자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피험자에게 아무 때나 마음이 내킬 때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한 뒤, 그 사람이 ‘지금 움직여야지’라고 마음먹은 순간과 실제로 뇌에서 운동 신호가 발생한 순간을 각각 측정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마음먹는 것이 먼저고 뇌 신호가 그다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뇌가 집행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뇌가 움직임을 준비하는 신호는 당사자가 ‘결정했다’고 자각하기 무려 0.3초 이상 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마치 뇌가 나보다 먼저 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 실험은 지금까지도 논쟁 중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자유의지가 뇌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다만 리벳 본인은 조금 다른 결론을 남겼습니다. 그는 뇌가 먼저 움직임을 준비하더라도, 최종 순간에 그 행동을 멈춰 세울 거부권만은 의식에 남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자유의지(free will)에 빗대어 ‘자유거부(free wo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자유란 무언가를 마음껏 시작하는 힘이라기보다, 잘못된 것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절제의 힘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의 본질이 방종이 아니라 선별에 있다는 이 관점은,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입니다.

스물넷의 잼과 여섯의 잼

철학과 과학의 무거운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이번엔 어느 마트의 잼 진열대로 가보겠습니다. 2000년, 심리학자 쉬나 아이엔가와 마크 레퍼는 한 고급 식료품점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시식대에 잼을 스물네 종류 늘어놓았고, 또 다른 날은 단 여섯 종류만 놓았습니다. 발길을 멈춘 사람은 당연히 스물네 종류가 놓인 화려한 진열대 쪽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실제로 잼을 산 사람의 비율은 여섯 종류만 놓였을 때가 스물네 종류일 때보다 약 열 배나 높았습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우리는 스물네 개의 잼 앞에서 오히려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지쳐서 돌아섰습니다.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이것을 『선택의 역설』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자유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자유는 해방이 아니라 마비가 됩니다. 우리는 고르지 못해 괴롭고, 어렵게 골랐어도 ‘저쪽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미련에 또 한 번 괴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그 문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우리는 수백 개의 잼 진열대 앞에 서 있는 셈입니다.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메일에 먼저 답할지, 어떤 삶을 살지. 자유는 분명 인간의 존엄이지만, 동시에 하루 종일 우리를 조금씩 지치게 만드는 형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자유란 선택지를 무한히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좋은 선택을 먼저 건네는 일

이 지점에서 저희 신시어리의 오래된 고민이 시작됩니다. 저희는 기업과 기관의 철학을 담은 굿즈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일의 상당 부분은, 실은 고객을 대신해 스물네 개의 잼 진열대 앞에 서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굿즈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소재도, 공정도, 마감도 매번 수십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이 모든 선택지를 그대로 고객 앞에 펼쳐 놓는다면, 그것은 자유를 드리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슈워츠가 말한 그 마비를, 사르트르가 말한 그 현기증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일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신시어리는 첫 번째 원칙을 ‘확신할 수 있는 선택(The Definitive Choice)’으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선택지를 나열하기보다, 저희만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가장 적합한 하나를 먼저 선별해 건네는 일입니다.

이 선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의 제품을 목록에 올리기까지 저희는 6개월 이상 그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선정한 뒤에도 60일 이상 직접 써보며 검증합니다. 인쇄 테스트와 내구성, 사용성, 안전 인증까지 저희가 먼저 확인합니다. 앞서 신경과학이 넌지시 알려준 것처럼, 어쩌면 진짜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아닌 것을 걸러내는 절제의 힘일지도 모릅니다. 고객을 대신해 수많은 ‘아닌 것’을 먼저 골라내는 일, 그것이 저희가 생각하는 배려의 방식입니다. 고객이 마주하는 것은 스물네 개의 잼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검증된 여섯 개의 잼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선택의 짐을 덜어드리는 일이 결코 고객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소한 선택의 피로에서 벗어난 고객은, 정말 중요한 자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조직의 철학을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 가치를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건넬 것인가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귀한 선택 말입니다. 자유는 본래 유한하기에 소중합니다. 덜 중요한 것을 대신 결정해드리는 이유는, 고객의 자유를 정말 중요한 곳에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를 자유롭게 선택한 나라, 미국

돌이켜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250년 전 자유를 국가의 첫 문장으로 삼았을 때,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권리’를 선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대단히 무겁고 어른스러운 선고에 가까웠습니다. 자유는 언제나 그 뒷면에 책임이라는 청구서를 달고 옵니다.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는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의 저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흥미롭게도 독립선언서가 실제로 종이 위에 새긴 단어는,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무제약의 Freedom이 아니라 Liberty였습니다. 둘은 흔히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결은 조금 다릅니다. Freedom이 게르만어에 뿌리를 둔, 제약이 없는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킨다면, 라틴어에서 온 Liberty는 사회 안에서 법과 책임으로 다듬어진 자유를 뜻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자유인 셈입니다. 어쩌면 인류가 250년에 걸쳐 배운 것은, 현기증 나는 Freedom을 조금 더 어른스러운 Liberty로 성숙시키는 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업과 기관의 철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조직이 “우리는 이런 가치를 지향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은 회의실의 벽을 넘어 매일의 행동과 물건 속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문서 안에 보관될 때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될 때 비로소 문화가 됩니다. 신시어리가 하는 일은 결국, 고객이 스스로 선택한 그 철학이 사람들의 손과 책상 위에서 오래도록 사랑받게 만드는 일입니다. 자유롭게 선택한 가치가, 자유롭게 세상에 닿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내일이면 지구 반대편의 밤하늘에 불꽃이 오를 겁니다. 그 불꽃을 올려다보는 누군가의 손에 저희가 만든 작은 물건이 들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물건이, 250년 전 몇 사람이 종이 위에 눌러 담았던 그 무겁고도 아름다운 단어를 조용히 이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Sincerely Yours,
자유롭게 야근을 선택할 자유만은 어쩐지 매일 주어지는 신시어리 드림